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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환각, 그리고 피로

어제 집회현장에 나갔고, 종로에서 하룻밤을 지샜다. 그 곳을 등진지 약 한 시간 이후 경찰은 결국 여느 때처럼 막판 강경진압으로 선회했다 들었다. ‘설마 오늘도 그러겠어’ 하면서 ‘밟히고 터지고 다치기’ 전 그 자리를 뜬 나는 그저 자괴감을 느낄 따름이다. 하지만 집회 전체를 두고 느낀 점은 좀 다르다.
일단.

물 총
‘물대포 쏘는 것이 어디 폭력 축에나 들어가냐’ 하지만 살수차의 위력은 모니터를 통해 들여다보는 것 그 이상으로 꽤 ‘세’더라. 가까운 곳에서 직격당하면 몸을 낮춰놓지 않은 이상 열이면 열 충격에 나가떨어진다. 몸을 웅크리지 않고 정면으로 맞았다간 크게 위험하다. 멀리서 물세례만 맞더라도 물이 공기를 쓸면서 날아 들어오기 때문에 후폭풍이 따라오는데 이게 또 사람을 위축시킨다. 물대포의 위치를 틀어보려고 장대를 드밀던 버스위의 남자 두 명을 향해 경찰이 그대로 쏴버린 장면은 아찔하기 짝이 없었다. 미끄러운 버스위에서 행여 사람이 추락하기라도 한다면 어찌될 것인지 경찰은 한 번 더 생각했어야 한다.
 먼발치서 물벼락만 맞더라도 아직 새벽바람이 시린 이즈음에 단벌 한 장으로 무작정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 중 체력이 약한 노약자나 여성들을 저체온증으로 탈진시키는데는 효과적이라는 점에서 물대포는 교활한 무기다. 멀리서 보는 사람들 ‘앗싸, 시원하고 좋은데!’ 하기에 물대포는 별로 낭만적이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제길, 콧물이 난다.


분 명

임계점을 넘어선 실정에 대한 다수국민들의 분노를 두고 잘 수용은 못할망정 거짓말이나 늘어놓고 집회를 하찮게 보는 정부나 경찰의 대응에는 당연히 몇 십 배 무거운 책임을 물려야 한다. 한참을 멋쩍게 얼굴을 마주했던 전경녀석이 갑자기 드르륵 테엽감긴 인형처럼 방패를 밀고 내려온다. 경악할만한 풍경이었다.
MB, MB 외친들 아직도 권위빨에 약한 사람들이 청와대에는 미쳤다고 들어가겠나. 단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를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패 닉

시위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진지할 수는 없다. ‘적어도 키보드 워리어들보다 공부는 더하고 모였다’ 이런 것도 아니다.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시위현장 뒤편으로 카메라를 돌려보면 옹기종기모여 반딧불을 밝히는 사람들, 이 풍경에 적당히 선을 긋고 치고 빠지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음,... 그냥 MB는 쇠고기 때문에 X새끼’ 論이 심심찮게 귀에 들린다. 담배꽁초로 광장이 뒤덮였고, 곳곳에서 모닥불이 타올랐다. 주 예수을 설파하는 아주머니도 계셨고, 쌍욕으로 전경들을 자극하는 분들도 계셨다. 구호는 고시철회를 뛰어넘어 때때로 ‘먼 우주’를 향했고, 노래는 여기저기서 엇갈려 부르는 통에 2중주, 3중주가 되었다. 날 새서 지친 시위대는 결국 매번 손쉽게 밀리고 터진다.
대운하, 공기업민영화, 부패 내각 등 이명박 정부 실정 전반에 대해 조목조목 성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너나 먹어’에 모든 힘를 집중시킨 뒤 ‘쥐새끼 탄핵’, '살인경찰' 등으로 점프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집회가 내포하고 있는 논리의 간극 사이가 이미 '감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느낀다. '집회는 현정부를 향한 국민들의 엄중한 경고다'라고 에둘러봐도 얻어맞은 집회현장의 분노는 이미 경고수준을 넘었다. 현장에서 때로는 이것이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지금 모니터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지독한 착시를 느꼈다. '경찰의 엄청난 폭력'에 쌍팔년도인지 08인지가 헷갈리는 거냐고? 아니다. 분노나 패배감을 떠나서, 그냥 정말로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피 로
‘MB탄핵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쇠고기 재협상은 해야 되겠지 않겠는가’ 정도의 생각을 가진 분들이 친구, 가족, 연인과 함께 따뜻한 차와 야참을 싸들고 광장에 모여 목소리를 맞추면서 이 밤을 축제처럼 즐기고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의경은 최소인원만 나와 교통을 통제하고, 대부분의 인원들이 내무반에서 곤히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자리에 엄한 서로를 향한 홧병만 남았다.  1%는 특별히 교활해서 작전을 잘 짠 게 아니라 그걸 당연한 걸로 알고 지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재협상 이후, 대운하 때문에 또다시 모여 집회, 맞고 끌려가고.
공기업 민영화 반대 때문에 또다시 모여 집회. 맞고 끌려가고.
맞고 끌려가고. 맞고 끌려가고.
걱정되는 것은 집회의 피로감이다. 시간이 약이 아닌 독이 되는 일이다.
커멘드센터. 필요하다.

by 와인더힐 | 2008/06/01 23:01 | 그밖의 쓸데없는 잡담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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