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일이든 언제나 하여가를 부르며 '실리'를 쫓던 녀석들 둘이, 노 대통령 서거 이후 잠시 숙연해진 적이 있었다. 사람의 생각이 변하는 대목은 설득에 의해서 보다는 감정에 충격이 가해질 때 더 많았기에, '죽은 시대'를 분기점 삼아 이 두 친구의 살아가는 방식이 예전보다는 짐을 내려놓는 쪽으로 바뀌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반 년이 지난 지금, 두 친구의 '질주속도'는 예전보다 더 빠르고 야박해졌다. 솔직히 좀 무섭다.
머리깎으러 미용실에 들렀다가 오랜만에 중앙일보를 읽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여당 내부의 세종시 논란과 결부시켜 놓은 글이었다. 원안 그대로의 추진을 말하는 박근혜를 견제하려는 친이계의 의도와 사전 발간 시기가 의도적으로 맞물려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아버지를 친일파로 내몰음으로) 이 글 또한 '오른쪽과 왼쪽'의 관점 차이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면서 잠시 머리를 싸맸지만,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 책마저도 '손익'을 두고 오가는 공방의 도구로 해석해야 하는가. 세상은 이미 그런 셀로판지 너머로 볼수 밖에 없는 걸까.
내가 지금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는 건 '한나라'를 까려는 내 총체적 의지의 발로인가? 아니, 어제 한 고비를 넘겨 조금 편한 마음으로 땡땡이 치고 있는 것뿐이다. 저 기삿글은 요즘 나의 말버릇대로 풀자면 '개연성에 위배되는 상상력'이다.
아니, 받아들이는 정도나 관점의 차이를 넘어서 이젠 중앙일보와 그 세계관 아래 놓인 대다수의 사람들과 서로 다른 울타리로써 분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문득 받았다.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세상이 수백 수천년 가까이 이런 식으로 야박하게 돌아간다면. 강남과 그 이외 지역 사람들간의 '유전적' 차이가 발생해 '섞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단 상상을 해본다. 실제 DNA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미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 손해보고 사는 것이 열성 취급 당하는 세상의 공기는 이미 내 폐를 가득 채우고 있다.
공기를 받아들인 누군가과 호흡이 가쁜 누군가는, 더는 섞일 수 없는 살갗처럼 마음마저 그렇게 멀어져 간다.
언젠가 술자리에 둘러앉은 친구들이 '중앙일보' 못지 않는 모진 상상력으로 하여가를 부를 때 구석의 나는 무슨 궤변인 듯 '손해보는 부끄러움'을 토해낼 것인가.
머리깎으러 미용실에 들렀다가 오랜만에 중앙일보를 읽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여당 내부의 세종시 논란과 결부시켜 놓은 글이었다. 원안 그대로의 추진을 말하는 박근혜를 견제하려는 친이계의 의도와 사전 발간 시기가 의도적으로 맞물려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아버지를 친일파로 내몰음으로) 이 글 또한 '오른쪽과 왼쪽'의 관점 차이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면서 잠시 머리를 싸맸지만,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 책마저도 '손익'을 두고 오가는 공방의 도구로 해석해야 하는가. 세상은 이미 그런 셀로판지 너머로 볼수 밖에 없는 걸까.
내가 지금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는 건 '한나라'를 까려는 내 총체적 의지의 발로인가? 아니, 어제 한 고비를 넘겨 조금 편한 마음으로 땡땡이 치고 있는 것뿐이다. 저 기삿글은 요즘 나의 말버릇대로 풀자면 '개연성에 위배되는 상상력'이다.
아니, 받아들이는 정도나 관점의 차이를 넘어서 이젠 중앙일보와 그 세계관 아래 놓인 대다수의 사람들과 서로 다른 울타리로써 분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문득 받았다.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세상이 수백 수천년 가까이 이런 식으로 야박하게 돌아간다면. 강남과 그 이외 지역 사람들간의 '유전적' 차이가 발생해 '섞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단 상상을 해본다. 실제 DNA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미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 손해보고 사는 것이 열성 취급 당하는 세상의 공기는 이미 내 폐를 가득 채우고 있다.
공기를 받아들인 누군가과 호흡이 가쁜 누군가는, 더는 섞일 수 없는 살갗처럼 마음마저 그렇게 멀어져 간다.
언젠가 술자리에 둘러앉은 친구들이 '중앙일보' 못지 않는 모진 상상력으로 하여가를 부를 때 구석의 나는 무슨 궤변인 듯 '손해보는 부끄러움'을 토해낼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