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파 썰기 1.00

(스포일러 섞였으니 파를 아직 안 보신 분은 백스페이스 하십시오)


-1.
에바가 안 감독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었다고 기억하는 내게 인류의 운명을 등에 짊어진 모양새의 에바는 왠지 불편했다고 2년 전쯤에 적었다. '파' 역시 도입부에 잠깐 모습이 비치는 유럽기지를 통해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에바의 싸움은 전지구적인 것'이라고 위세 좋게 선포한다. '나 새롭고 빵빵한 新 극장판이다' 라고.

0.
모든 관객을 위한 엔터테인먼트로서 에바를 재창조했다는 '서' 개봉 즈음 안 감독의 말은 물론 진심이었겠지만, 진심이 항상 진실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무심코 에바를 보러 극장을 찾은 이들의 물음표를 채워주는 예의 따윈 역시나 없다. 단지 이제 어른이 된 마당에 '그 시절 나의 선택을 뒤집을 수 있다면 어땠을까'란, 안 감독을 비롯한 모든 팬들의 바람을 이뤄낼 만한 규모가 갖춰졌기에 사치스럽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에바를 기억하는 어른들과 에바에 빚을 진 아이들이 겸상하는 두 번째 잔치다.

1.
'아버지와의 교감'이란 대목이 생각보다 커질 것 같다. 감독은 TV판 엔딩을 두고 팬들에게 '저딴 부모에게 얼어죽을 감사?!'라며 맹폭당했던 기억을 갈아치우고 싶었던 걸까. 예전보다 담백해진 아들에게 겐도가 결말에 이르러 어떻게 화답할지 궁금해진다. 
다만, 죽은 아내를 위해서라면 자식이고 뭐고 없던 희대의 로맨티스트가 부정(父情) 때문에 삐끗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건 너그러워진 미래지 ADVANCE는 아니잖나? 가족끼리 오붓하게 식사하는 장면을 보게 될까봐 뜨악했었다. 겐도를 위한 진짜 '파'가 Q에서 전개될 거라 믿어본다. 원판, 신극장판과는 또 다른 미래를 보여주고 있는 영에이스의 사다모토 판 '에바'은 그런 의미에서 나쁘지 않았다.

2.
서의 '나는 에바 초호기 파일럿을 믿는다'와, 파의 '너 자신을 위해 싸워라'라고 외치는 미사토의 대사는 두 극장판을 거쳐 반복되는 후렴구다. 원작과 비교해 가장 중요한 변화다.
더는 에바를 타지 않겠다고 떠난 신지를 다시 잡아 끌어오는 대목들의 설득력이 '서'와 '파' 양쪽 모두 충분치 못한 건 불만이다. 미사토가 리리스를 보여주기 위해 신지를 도그마로 잡아끈 것, 그리고 벙커 안의 신지를 2호기로 잡아 쥔 마리의 돌출행동은 신지의 마음을 돌린 직접적인 이유라고 보기에는 초라하다.'한 번만 더 생각해주세요' 정도니까. 그보다는 에바를 타는 것이야말로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것, 스스로를 신뢰하는 것'이라는 당위가 신지를 움직였다고 보는 편이(각본이 그렇게 하라 명령했기 때문에)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바를 타는 것이 현실과 부딪히는 것인지 아니면 외부와 자신을 단절하는 또다른 방식인지 애매모호했던 TV시리즈와 옛 극장판과는 달리, 신극장판에서는 전자에 무게를 집중시키고 있다. 파는 이점에 있어 분명 ADVANCE다. 

3.
폭탄이 하나 있다. 마키나미 마리 일러스트리어스.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물로서가 아니라 장치(메신저)로만 작동하는 캐릭터이다보니 어디로 감정이입을 해야할지 도무지 틈이 없다. 게다가 감독은 마리 역의 성우 사카모토 마야에게 기존의 에바를 박살내달라 부탁한 걸로 아는데, 그럼 결국 파=마리였단 이야기였을 터. 하지만 에바를 변화시킨 건 기존의 등장인물들이었지 마리의 '자신만을 위해, 희열을 느끼기 위해 에바를 탄다'는 는 테마는 파의 이야기 축에서 겉돌았다. 아스카를 대신해 잠시 2호기 플러그에 들어앉았을 뿐, 기억에 남는 대사가 없다. "넌 뭐야! 당장 2호기에서 내려와!" 라고 외치려던 입을 두 손으로 포갰다.
뭔가 해줄 거라 믿었던 기대감에 때문에 그 실망도 컸던 셈이다. 그녀가 이야기의 '破'괴자로서 제대로 움직이게 될지는 Q까지 가봐야 알게 될 듯.

4.
텃밭일에 흙투성이가 되고, 소년요리왕에, 잘 웃는 신지. Q와 완결편에서 헤로인 한 명씩만 더 추가하면 할렘물로 갈 기세다.

5.
티아란가 하는 아가씨들이 무대 인사 중에 '에바는 신지, 레이, 아스카의 삼각관계 이야기' 라고 했던 듯한데.
날카롭다.

0.
에바가 안 감독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었다고 기억하는 내게 You Can (Not) Advance 같은 내려다보는 식의 카피는 곧이 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사이비 교주. 당신은 늙었다.
이 극장판은 당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나는 진화했다. 그렇지 않나?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죠.

by 와인더힐 | 2009/11/25 15:57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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