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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님, 그리고 마로 애니메이션

지브리의 신작 '마루 밑 아리에티'의 국내 개봉일이 9월 9일로 정해졌다고 한다. 포뇨 이후 1년 반 만에 찾아온 지브리 작품임에도 왠지 10년은 더 기다린 것 같은 기분이다. '…아리에티'는 요네바야시 히로마사라는 서른 일곱 신인 감독의 작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린 후배에게 지휘봉을 맡기고 뒤로 물러났다. 일단은.

4년 전 미야자키 고로 감독의 게드전기를 보면서 좋든 나빴든 그 작품이 지브리에 있어 어떤 의미있는 변화의 이정표로 기억되려면 앞으로 한 두 작품은 더 지켜봐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완고한 영감님은 지브리를 다시 자신의 친정체제로 되돌렸고, '포뇨'를 만들었다. 2년 전 쯤 유튜브에 떠도는 게드전기와 관련된, 조회수가 꽤 높았던 토막 영상을 보았다. 아마도 '이야기에 자기 투영을 하면 안 된다'는 뜻의 말을 하며 극장밖으로 나와 착찹한 심정으로 담배를 피던 영감님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저녁시간 채널을 돌리다 보니 NHK 종합에서 <지브리 창작의 비밀 - 미야자키 하야오와 신인 감독, 갈등의 400일>이라는 다큐를 내보내고 있었다. 내용은 사뭇 흥미로웠다. 후반부 20분밖에 보지 못했지만서도.

1.
97년 세상을 떠난 '귀를 기울이면'의 콘도 요시후미 감독이 미야자키 감독과 오랜 선후배사이였단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귀를 기울이면'을 만드는 과정에서 둘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다고 다큐는 전한다. 미야자키 영감님은 후방에서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을 두고 계속 태클을 걸었고, 그 때문에 콘도 감독은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듯하다. 당초 지병을 안고 있었던 콘도 감독은 작품을 진행하면서 건강이 악화되었고, '귀를 기울이면'이 완성된 이후에도 두 해동안 계속 상태가 나빠지더니 세상을 떠났다. 다큐가 보여주는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곤란하지만, 콘도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유감이다'란 말로 대화를 맺은 미야자키 감독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이 어렸다.

2.
'(이대목에 대해서)잘 모르는 것 같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것 같아.'
새 감독에게 맡기고 일절 손대지 않겠다던 미야자키 감독. 아니나 다를까. 현장에 한 마디를 슬쩍 던지고 자리를 뜬다.
여 주인공 소인 아리에티가 (아마도) 어머니가 실종된 것에 상심해 눈물을 흘리고 있자, 남자 주인공인 인간 쇼우가 손을 내밀며 '(너의 어머니를) 함께 찾아보자'고 말한다. 눈물을 닦은 아리에티는 곧바로 내밀어진 손에 올라타 쇼우의 어깨에 올려진다.
영감님의 의중은 소인인 아리에티와 인간인 쇼우는 대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출로는 '내가 널 도와주겠다'는 쇼우(거인)의 의지에 의해 아리에티(소인)이 이끌려가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각본의 의도와는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요네바야시 감독은 며칠을 고민한다. 그리고 답을 내었다. 눈물을 닦아낸 아리에티는 '함께 찾아보자'란 쇼우의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자신 스스로의 결의를 보인다).' 비로소 그 대목에서의 아리에티와 쇼우는 같은 눈높이에 마주섰다. 신인 감독은 자력으로 훌륭한 답을 낸 것이다.

3.
원화 마감을 앞둔 제작 현장.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핀치에 몰린 요네바야시 감독 곁에 영감님이 다가선다. 늘 자신이 앉아 작업했던 그 자리를 대신한 후배애게, 창밖의 풍경이 자신이 앉아있던 시절과 변했다는 말을 건넨다. 긴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영감은 에두른 언어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준 셈이고, 얼마 안 있어 요네바야시 감독은 훌륭히 작업을 마무리했다.

4.
영화 관계자들에게 완성된 필름을 처음 공개하는 자리. 상영관 안에서 머뭇대다가 미야자키 영감님의 뒷줄 한칸 옆좌석에 앉으려던 요네바야시 감독.
'마로(요네바야시 히로마사의 애칭), 넌 내 한 줄 앞으로 가.'
영감님 참 짓궂다. 뒷짐 짚고 있는 대선배에게 처음 영화를 내보인다는 것도 엄청난 중압감인데 저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상영시간 내내 그 프레셔를 이겨내라니.
이윽고 필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2번에서 언급했던 신이 지날 때, 미야자키 감독은 이맛가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그가 이 부분에서 후배의 답에 납득을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리에티와 쇼우가 헤어지는 클라이막스신. 놀랍게도 완고한 노 감독의 볼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그는 어린 후배가 만든 첫작품을 비로소 극찬했다.


후계자 없이 11년. 은퇴를 번복하고 세 작품이나 더 만들어 낸 후, 자신의 친아들이 만들어낸 게드전기에 대한 실망감. 포뇨. 그리고 이 다큐에서의 눈물.
나는 그가 일본사회의 자폐성와 신경증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어르신 스스로도 그러한 문제들에서 아주 자유롭진 않잖수?'라며 빈정대곤 한다.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영감님이 여전히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연출력을 지닌 애니메이터이며. 온전한, 그리고 건강한 메세지를 만드는 유일한 '애니메이션 영화'감독이라고 여기고 있다.
한 세계를 30년가까이 고독하게 짊어지고 있던 소년이 이제서야 겨우 제 화법에 그럭저럭 따라와줄 후계자를 만났다. 그래서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영감님은 이제 칠순이다. 콘(콘도 요시후미의 애칭), 아들, 그리고 마로. 이 이후 '그가 원안을 내지 않은 작품'들이 그가 없는 지브리를 계승해줄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어쨌든 이 두 번 오지 않을 명감독의 짐이 '아리에티'로 인해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마루 밑 아리에티'의 개봉일은 9월 9일이다.

P.S. '행방불명'에 등장한 가오나시의 모델이 마로 감독이었다 들었는데, 다큐를 보고 납득했다. 납득했다. ㅎㅎ


덧글

  • namoo_ 2010/10/02 19:19 #

    마로 감독 사진 찾아봤어. 얼굴이 닮은거여? 웅얼거리는 게 닮은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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