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위의 통나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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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르윈 코믹 데이비스 실사영화

 


 (이 글은 픽션이며, 실제 인물과 지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30분 넘도록 기다린 그의 눈은 가늘어져 있었다.

 보아하니 서른 살 안팍. 큰 키에 머리 눈썹 모두 숱은 빡빡하고 눈은 소년만화 주인공처럼 생겼으나 모진 생계에 닳고 닳은 그 눈동자는 빛을 반쯤 잃었다. 우중충한 색의 목도리 셔츠, 코트, 면바지. 애잔할만큼 하잘 것 없다. 사실 신경 쓰지도 않을 것이다. 외모 따위에는. 하기사 자신의 모든 컬러는 지금 그가 걸터앉은 의자 옆에 올려둔 커다란 캔버스가방에 들어 있을 테니까. 나는 상담실 문을 닫고 히터를 틀었다. 그에게 인사하고 웃어보였다. 그는 떨떠름하게 답례했다. 난 그의 맞은편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악수는 됐고.

 “늦어 정말 죄송합니다. 자 어디, 원고부터 보고 이야기 나누도록 하죠.”

 그는 칼자루에서 칼을 뽑는 사무라이처럼 제 캔버스 가방에서 A3사이즈 클리어파일을 꺼냈다. 통화했던 대로 단편 원고. 장편을 염두에 둔 파일럿 에피소드. 칼 같은 36매. 나는 파일 커버를 넘겼고, 통찰하기 시작했다. 쏜살같이 읽어나갔다.
 솔직히 말해 훌륭했다. 데생에는 실수가 없다. 만화다운 데포르메도 능수능란. 1페이지당 컷구성은 많아야 8컷, 답답한 4단 구성은 절묘하게 피해가며. 원경 근경 오가는 리듬감 있는 연출과 결정적일 때 강렬한 클로즈업. 캐릭터는 결코 컷의 엉뚱한 구석에 놓여 독자의 눈을 피곤케 하지 않았다. 대사량도 과함이 없으며 말칸 배치도 완벽. 이야기의 완급조절도 노련했고, 마지막 세 페이지는 인상적인 반전으로 채웠다. 박수를 쳤다. 마음속으로. 만화인으로서.
 하지만,

“출판만화 경험이 있으시죠?”

 ‘알아봐주는구나’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고슴도치라 그런 게 아니었다. 고슴도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6년 전 일본 아카나미사 월간 트레이서에서 작화담당으로 10개월의 연재를 경험했다. 일본인 스토리 작가가 장편인 제 스토리를 돌연 중단편으로 확 꺾어버리면서 단행본 2권에 그쳐버린 그 작품. 기억하고 있다. 당신의 그림도. 그는 한국에 돌아와 고향인 XX지역에서 유명 선배작가들의 치프어시일을 계속했다. 그 후 끝없이 만화란 행성의 대기권을 공전했을 것이다. 만화왕국에서 1년 가까이 지옥 같은 마감을 이겨낸 그 캐리어. 그 모든 경험이 소진되고 빛바랜 재능만 남을 때까지.
 거두절미, 나는 잔얼음 씹듯 말했다. 날카로운 조각에 찔려 입속이 다치는 것은 나였다.
 “좀 더 스토리텔링이 친절했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소재는 물론 독특해요. 하지만 실험을 반길 만큼 시장상황이 좋진 않습니다. 이런 말씀 드릴 입장은 아니지만 혹시 웹툰은 생각해보셨나요?”
 ‘좀스런 짓은 안 한다’니, 이런 사무라이 양반을 봤나.
 나는 명함을 건넸다. 허리 고무줄 풀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좀 더 일찍 오시지,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계신데. 안타깝지만 제일 중요한 것만 빼고(No Sound). 그의 한귀로 흘러나가는 내 말들이 보였다.

 둘 다 일어났다. 쓸쓸한 그의 등에 대고 ‘언제든지 연락하라’며 던져보았다. 둥근 그 귀가 해치처럼 착 닫혔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어둑한 밤거리로 그가 사라졌다.
 야박해서 미안합니다. 형제여.
 만화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하지만 쉽게 손잡아 줄 수 없는, 나의 나이든 형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