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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돌보거나 찾으러 나선 영화들 단평_181105 실사영화

살아남은 아이

 ‘같은 듯 다르게 흔든다’는 박평식 대인의 별점평에 또 한 번 무릎을 쳤다. 대인과 나는 영원한 소울메이트. 다만 개연성에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기현은 고발자가 된 이후 성철 부부를 볼 낯이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그들이 용서해준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가해자 기현이 피해자 부부와 함께 그 아들을 죽인 장소에 소풍 가방을 들고 동행한다. 가잔다고 간다. 거기가 어딘지 몰랐을까? 기현은 돌변한 성철에게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목을 졸라오는 그 두 손을 체념했어야 한다. 이것만이 아쉽다.
이제와 비슷한 작품이 여럿이지만, 대인 말마따나 <살아남은 아이>는 다르게 흔드는 모범이다.


★★★☆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

 이별꽃을 보는 내내 영이는 따뜻해보였다. 이따금 눈물을 참는 듯했다. ‘아들이라 저런 점이 좋았겠구나’하며 환히 웃기도 했다. 영이는 언젠가 사랑하는 자녀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저 자신과 마키아의 미래를 이해하고 있었다. 아리엘의 마지막 순간. 영이는 자신의 히비오르 어딘가에 새겨진, 수많은 가족들에 둘러쌓인 가운데 남은 호흡을 세던 일백일곱살 수하를 떠올렸다. 딸을 가슴에 묻고 백여 발자국 걸어나온 들판에서 영이는 마키아를 끌어안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이해는 무슨 이해. 이런 법이 어디 있냐며. 자식을 먼저 보내는 나 같은 게 부모 맞냐며. 하지만 서로 눈물을 닦아주고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어 떠올렸다. 운동장 저쪽에서 쪼르르 달려와 발등을 꼭 밟은 뒤 처음 엄마라고 불러주던 초등학교 입학식 날. 햇살 내리쏟던 봄날의 발 밟기 놀이를. 그 행복을. 하나하나 기억해냈다.
배 아파 낳은 자식과 가슴으로 키운 자식을 둔 두 엄마의 거울 구도. <늑대아이>와의 비교를 통해 돌아보는 일본 이야기 속 관습. 유한한 존재와 불멸자 간의 사랑이라는 클리셰의 변주.
그런 메마른 이야기나 하려던 W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


서치
웬걸. 상업영화로서도 정치적으로도 안전한 최첨단 가족영화. 어떤 불경함을 바랐던 나로서는 좀 실망스럽다.
아무튼 SNS는 어디까지나 해악임을 잊지 말자.


★★★


너는 여기에 없었다

코모두스 이래 항상 고통받아온 호아킨 피닉스. 칸의 트로피가 아깝지 않은 곶통 스페셜리스트로서 이 영화를 통해 그 진수를 보여준다. 새처럼 사라진 엔딩 장면처럼, 앞으로는 적당히 아프시길.


★★★★